Torvish Rusalny


 

 

Rusalny
옛날에, 소중한 친구에게 약속의 증표라는 걸 받은 적 있어.
물건을 서로의 마음의 증표로 삼는 건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문화 같은 거라고 하더라.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같은 모양의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우는 것으로 관계를 증명한다고도...

물론 너와 나 사이의 관계에 물질적인 증명이 필요하지는 않겠지.
거추장스러운 걸 강요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나도 해보고 싶어서 그래! 너, 너도 알잖아. 내가 늘 어떤 마음인지......
그...러니까... 끼우는 시늉만 잠깐 해줘도 돼...

...아! 꺼내 보여주지도 않고서 말하고 있었네...!
(부랴부랴 품을 뒤적여 같은 모양의 반지 두 개를 꺼내 보여준다.)
난 이런 걸 잘 모르니까, 여기저기 물어가며 부탁해 만든 거야. 모양새가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상에 단 두 개 뿐인 반지야... 하하...


있잖아...
손가락 좀 줄래...?
이, 이건 역시 이상한가...
손...? 손 좀 줘!
Torvish
(톨비쉬가 천연덕스럽게 두 손 모두 손등이 보이게 내민다. 언제나처럼 나긋한 조로 묻는다.) 내게 프러포즈하는 겁니까?
Rusalny
(그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긴장해 뻣뻣하던 표정이 흐물흐물 풀어진다. 순간 어느 쪽 손을 골라야 하는지 헷갈렸는지 머뭇거리다가, 오른쪽 손등에 고개를 내려 새가 모이 쪼듯 입맞추고 떨어진다.) 그, 그래도 돼? (왼손을 꼬옥 붙들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꽤 자주 내보이는 낯 중 하나다.)

... 나 방금까지도 무슨 말 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바보같은 프러포즈가 어디있어어... (우는소릴 내다가도 뒤늦게 생각난듯 털썩 한쪽 무릎을 꿇는다. 순서가 엉망진창이다. ...) ......처음부터 다시 할까...?
Torvish
청혼이라면 진정성이 단연 돋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떤 말을 해도 마음이 쉬이 차분해지지는 않겠군요. 하하. 너무 간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데요···. (무릎을 꿇은 그를 따라 몸을 낮추었다. 바닥으로 느리게 옷자락이 나앉는다. 비슷한 눈높이로 그와 마주한다.)

루살니가 어떤 요청을 하든, 그에 대한 답이 수락이든, 거절이든··· 내가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어줄 것은 자명한데, 두려울 것이 있습니까? 음··· 물론 거절의 말이라면 당신 마음이 조금 쓰리기는 하겠지만.

하하···. 농담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보세요. 놀라는 연기라도 시도하겠습니다.
Rusalny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여상한 얼굴을 하고서 제 속을 꿰뚫는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본심이 헤집어지는 것마저 기분 좋게 느껴져 멍청한 얼굴이 되어 웃음이 샌다.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들켰다면 처음부터 다시 할 필요도, 그에게 연기를 요구할 필요도 없다. 순서가 틀려먹었어도...)
(슬금슬금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서 그를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다. 어디선가 주워듣고 본 말과 행동을 모방한다.)

결혼해줄래?
......대단하고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냐... 네 말대로... 넌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겠지만...

나,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 (뱉어놓고서야 결국 꼴사납게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앗, 이... 이러려던 게 아닌데... 흑, 미안해애... 난 그냥... 그냥 너랑... 가족이 되고 싶었어... 너무 좋아해서, 나, 나한텐 이런 거라도 필요했어어...
Torvish
나의 삶은 주신의 뜻을 따라 엄숙히, 신성의 길을 보필하는 데에 쓰이고 있습니다. 언젠가 내 의식이 이어지지 않을 그 순간까지요. 그러나 당신과 생의 끝까지 함께함과는 별개로, 나를 배필로 삼은들 당신이 외로울 일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싶으나 들어줄 수 없는 상황도 올 겁니다. 아쉽게도, 이멘 마하에서의 성대한 결혼식 또한 상상에만 그쳐야 합니다.

종이에 쓰인 계약보다 입으로 맺은 약속이 더 단단한 구속을 가지게 되고는 합니다. 언약이란 그렇기에 엄중하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익히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루살니, 괜찮습니까? 수많은 이들과 연 맺을 기회가 당신에게 분명히 올 텐데, 나와 이렇게 엮이는 것이요.

당신과 나는 언약 없이도 이미 끈끈한 유대로 묶여 있지요. 나는 그 실이 명확히 보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줄줄 쏟아지는 눈물을 훔쳐낸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울지 마시고요. 하하···. 울음부터 그치고 마저 이야기해 보죠.
Rusalny
(그 손을 부여잡고 뺨을 기댄다. 천천히 울음을 멈춘다.)
알고 있어... 내 외로움을 오로지 너를 통해 채울 수 없다는 거. 내가 바라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건 누구도 할 수 없을 거야.
성대한 결혼식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해. 약속을 맺는 순간 눈 앞에 실재하는 건 너뿐이어도 좋아. 너만 있으면 돼.

톨비쉬... 넌 내게 상처주기 싫어서, 내가 실망할까봐... 네가 내어주지 못할 것들만 일러주는 거지?
너는 늘,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내어줄 것과 내어주지 못할 것만을 생각하는구나. 네가 나에게 받아가고 싶은 건 없으면서...

언약이 나를 구속할까 염려하는거야? 너는? 너는 괜찮겠어?

난 괜찮아! 나의 끝을, 내 영혼을 주고 싶은 건 앞으로도 너뿐일 거니까...!

언젠가 쓸모를 다한 내 혼의 윤회가 끝나버린다면, 명계따위로는 가고싶지 않아. 네가 가져가줘. 내 피난처를, 너를 종착지 삼게 해줘.
난 그거면 돼...

...살아있는 동안에도 난 너를 제일 좋아할텐데... 수많은 이들과 연 맺는 얘기는 왜 하는 거야아... 이, 이 바보.
그러니까 결혼해줘...
다, 당장 서약을 읊고 식을 올리자는 건 아냐...
거절해도 울지 않을게...
내가 너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싶은지 알아주기만 하면......
Torvish
(청량한 웃음소리가 짧게 울린다.) 어쩌면··· 미래의 일을 지레 겁먹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내 맹세는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하하, 겁쟁이라고 놀리셔도 좋습니다. 뭐어, 돌이켜 보면 항상 그래왔습니다만···.

···루살니.

나와 당신이 어느 날 이 땅에 자리 잡아 지극히 평범하고 안전한 생을 지낼 날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혹은 이 세계가 크게 변화하여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보내면서도··· 서로만큼은 변하지 않았기에, 격변의 중심에서 안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당신의 청혼은 나로 하여금 그런 상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군요.

(남은 반지 하나를 가져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당신이 그러하였듯이, 톨비쉬가 당신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운다. 묘한 표정의 톨비쉬는 곧 미소를 지으며 반지 위로 찰나의 입술을 내린다.)

당신께서 나를 부디 당신의 피난처로, 종착지로 삼아주기를. 내게 가진 마음을 원하는 만큼 쏟아내고, 원하는 만큼 받아 가기를.

그것이 나의 온 생의 사명이니···.
Rusalny





나... 나, 너무 행복해...!

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기쁘고 즐거우면서도 내일이 사라져 버릴 것처럼 불안해. 상상력도 그리 좋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상상한 순간들을 꼭... 같이... 내 눈으로 보고 싶어...!

함께 멀리멀리 여행을 떠나고, 처음 보는 것들을 구경하고, 너와 나만의 것들을 가지고... 보금자리를 찾아 변함없이 살아가고. ...

톨비쉬... 네 삶에서 온전히 너만의 것을 가져본 적은 있어? 후대에 물려주고 떠날 그런 것들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네 손에 쥘 수 있는 것 말이야.

...이건 네 거야. 네가 받아줬으니 무를 수는 없어.

(반지 끼운 손을 움켜쥐고서, 제 가슴팍으로 끌어간다. 끊임없이 해안가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처럼, 심장의 박동이 당신의 손바닥에 내달려 부딪힌다. 아마도 영원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건 네 거야......
Torvish
···생각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긴 고뇌의 종착에서 예상 못 할 해답을 내어주더니, 결국 당신 자신마저 내게 주는 것입니까. 하하···.

···루살니를 각별히 여김과는 별개로, 이 육신과 영혼이 아튼 시미니 님에게 속해있으므로 당신에게 나의 소유권을 함부로 드릴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있는 당신이니 아쉬운 마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도 기회를 잘 활용하여 취할 만큼 나의 것을 취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루살니. 내게 소유를 안겨주어서요.

(톨비쉬는 흔들림 없는 시선을 맞춘다. 짧은 시간 당신을 깊이 들여다보던 톨비쉬가 다시 입술을 뗀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더 울어도 괜찮기는 한데··· 이만 달래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얼굴이 상하니까요.

···막 정혼한 사람을 울렸다는 평판은 썩 좋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하하.
Rusalny
알아...! 정말 정직하네...! 그래서 네가 좋은 거지만...!

나, 난... 네 마음 일부만이라도 가지면 만족할 수 있어... 네 만물을 향한 마음이나 주신께 바치는 신앙과는 다른 거, 오로지 나에게만 주는 마음 말이야. 그것 만큼은 내 거잖아. 그 눈빛도, 손길도 다...

응..., 두고 봐. 톨비쉬... 세계가 몇 번 뒤집힐 만큼의 시간이 지나도록 살아남아 내 모든 걸 네게 쏟아주고, 그만큼 네 것을 받아갈 거야. 오래오래 떨어지지 않는 포옹 같은 것 말이지. 
정말 두고 봐...

(훌쩍거리며 시린 눈을 가늘게 뜬다. 조금 엉망인 얼굴이지만,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히죽댄다.) 정혼한 사람이라니, 그 말... 정말 듣기 좋은걸...
...어, 어서 달래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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